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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한국군 파병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한국군 파병

베트남 전쟁(1954–75)은 북베트남의 공산 정부와 남베트남 내의 동맹인 베트콩이 남베트남 정부 및 주요 동맹인 미국과 맞서 싸우는 장기간의 갈등이었다. 베트남에서는 "미국전" 또는 "국가를 구하기 위한 미국에 대항하는 전쟁"으로 불리며, 이 전쟁은 더 큰 지역 갈등의 일부이자 미국과 소련 및 각각의 동맹 사이의 냉전의 실현이기도 했다.

  • 베트남 전쟁의 원인
  • 베트남 전쟁 피해 규모
  •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파병
  • 결론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피해

베트남 전쟁의 원인

이 갈등의 핵심에는 1954년 프랑스 식민 행정을 물리친 북베트남의 전체 국가를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를 모델로 한 단일 공산 정권 아래로 통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반면에 남베트남 정부는 서방과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베트남을 보존하기 위해 싸웠다. 1950년대 전반에는 소규모로 미국 군사 자문단이 존재했지만, 1961년부터 대규모로 투입되었고, 1965년에는 활성 전투 부대가 투입되었다. 1969년까지 미국 군대는 50만 명 이상이 베트남에 주둔했다. 한편 소련과 중국은 북베트남에 무기, 물자, 자문단을 투입했으며, 북베트남은 이에 대응하여 남부 전투에 정규군을 지원했다. 늘어나는 전쟁의 비용과 피해는 미국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고, 1973년에는 미국 전투 부대가 철수했다. 1975년 남베트남은 북부의 완전한 침공에 휘말렸다.

베트남 전쟁 피해 규모

이 장기적 갈등으로 인한 대가는 모든 관계자에게 혹독했다. 1995년까지 베트남은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며, 양쪽의 민간인이 최대 200만 명, 북베트남 및 베트콩 전사자가 11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미국 군사는 전쟁으로 인해 20만 ~ 25만 명의 남베트남 군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1982년에는 워싱턴 D.C.에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전쟁으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미국 군인 57,939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목록에는 사실상 캐나다 시민인 군인이 적어도 100명 포함되어 있다. 남베트남을 위해 소규모로 싸운 다른 국가들 가운데에서 한국은 4,000여 명 이상, 태국은 약 350명, 호주는 500여 명 이상, 뉴질랜드는 약 30여 명이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파병

한국의 경우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였는데, 이처럼 대규모의 한국군 파병은 한국과 미국 양측의 이해관계가 합치된 결과였다. 한국의 경우 자국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한반도 내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규모를 유지하려 했고, 미국의 한국군 감축노선에 방어하려는 차원에서 한국군의 파병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파병을 통해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미국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원조를 확대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11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에 방문했을 당시부터, 한국군 파병을 제안했다.

한국의 제안에 미온적이던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북폭을 시작하고 ‘많은 깃발(Many Flags)’ 정책을 채택하여, 자유진영 국가들에 적극적으로 파병을 요청했다. 특히 한국군의 경우 미군에 비해 유지비가 싸면서도 같은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에 전투에 투입하는 데 유용했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선호되었다. 이후 자국 내 반전시위가 격해지면서 자국에서 병력자원을 동원하기 어려워지자 파병요구가 더욱 강해졌다. 특히 1966년 3월 ‘브라운 각서’는 파병의 반대급부를 제시한 것으로 주목된다. 그 결과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만 8년 6개월 동안 3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결론

전쟁으로 인해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강력한 군사 대국으로 등장했지만, 농업, 사업 및 산업이 중단되었고, 그 나라의 큰 부분은 폭탄과 제초제로 인해 흠씬 벗겨졌고, 지뢰가 심어진 농촌이 많았으며, 도시와 마을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975년 남베트남에 충실한 사람들의 대규모 이주가 있었고, 공산주의 체제가 부과한 경제적 구조조정을 피하기 위해 1978년에는 또 다른 "보트 사람들"의 물결이 있었다. 한편, 미국은 군사적으로 낙담되었고, 민간 선거인들은 깊게 분열되어, 그 동안의 가장 긴 기간이자 가장 논란이 많은 전쟁에서 패배에 대한 타협 과정을 시작했다. 두 나라는 마침내 공식 외교를 재개했다.